빚의 탕감은 곧 죄의 탕감입니다. ‘쉼,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란 책을 쓴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는 ‘빚의 탕감은 곧 죄의 탕감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붙입니다. “우리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관계를 깨뜨렸고, 그 관계가 우리에게 무상으로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힘으로는 그것을 회복시킬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말하는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는 참으로 핵심적인 청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빚이 얼마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매정한 종의 비유에서처럼 만 탈렌트라고 말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것에, 영원에서 우리를 끌어안으시고 돌보시고 원하시고 지탱하신 사랑에 비긴다면 우리의 빚은 계산할 수도 없고, 그분께서 다시 무상으로 그 빚을 탕감해 주지 않으신다면 그것을 갚을 길도 없습니다.” 마르티니의 표현은 정확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하느님께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곧 죄 때문에 생겨나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산더미같이 우리의 빚은 늘어만 갑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그 빚을 조금씩 갚아나가고는 있지만 쉽사리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일만 탈렌트를 빚진 종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용서를 청하고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기도하면서 내 옆에 있는 이웃의 작은 잘못은 용서하지 못하고 죄를 뒤집어 씌우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로 인해 우리의 빚이 늘어만 가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의 죄가 탕감되었듯이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도 탕감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을 살아가기 위한 준비입니다. 마음 속에 죄를 품고 신앙을 살아가면 온전한 신앙의 모습을 이룰 수 없습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불편함이 있고 신발 속에 작은 돌맹이가 계속 발에 거슬리게 불편합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관대함을 배움으로써 우리의 신앙도 불편하지 않은 신앙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우리도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그 은총에 힘입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며 살아가는 신앙이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