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회

가톨릭 청년신자들로써 조직된 평신도 사도직 단체. 주로 일반 청년신자들로써 구성되어 신앙의 성숙, 사목활동의 지원 및 대 사회선교와 봉사를 목적으로 교회 안팎에서 신심 · 전례 · 교육 · 선교 · 봉사활동 등을 수행한다.

   한국에 가톨릭청년회가 생겨난 것은 이미 1900년대의 일로서, 특히 1922년 교황 비오 11세가 회칙 에서 가톨릭운동(Catholic Action)을 제창한 데 자극을 받아 국재는 물론 간도지방에서까지 조직과 활동이 활발하였다. 1922년 서울교구에서는 종현청년회를 비롯한 각 본당 청년회를 통일하여 ‘경성구 천주교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였고, 1924년 대구에서는 ‘남방천주공교청년회’를 창립하여 각 지방교회에 지회(支會)를 설치하였다. ‘남방천주공교청년회’는 교육사업으로서 해성여자학원을 운영하는 한편 1927년 4월 기관지로서 오늘날 <가톨릭신문>의 전신(前身)인 월간 <천주교회보>를 창간, 교회 안팎의 소식과 신앙 및 교양을 위한 기사만이 아니라 사설 등을 통해 가톨릭 청년운동을 제창하고 역설하였다.

   또한 ‘경성구 천주교청년회연합회’는 당시 교회가 인수한 남대문상업학교의 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1927년 7월 서울에서 월간지 <별>을 창간, 1933년 4월 <천주교회보>와 함께 잡지 <가톨릭청년>의 발간을 위해서 폐간될 때까지 발행하였다. 이 두 단체는 신문발행 외에도 강연회 · 미술전람회 · 연극 공연 · 체육대회 · 야학 운영과 함께 이재민 구호사업 등에도 힘을 기울였다. 특히 ‘경성구 천주교청년회연합회’는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사업으로 《조선천주공교회 약사》를 발행하는 한편 의료기관의 설립을 발의하여 1936년 서울에 성모병원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1933년 3월 조선 주교단은 ‘가톨릭 진행’에 대한 교서를 발표, 각 교구마다 가톨릭진행회를 설치하고 모든 신자들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것은 1934년 8월 교구 가톨릭운동연맹을 결성한 평양 교구로서 이미 ‘평양천주공교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강연회 · 야학 운영 · 연극 공연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각 본당은 물론 교구 차원의 연합체로서 활발히 전개되던 가톨릭청년회의 활동은 1940년대에 이르러 일제의 탄압으로 다소 침체되었으나 1945년 8.15광복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1946년 7월 서울교구 청년회연합회가 해방 후 첫 정기총회를 개최하였고, 8월에는 여자 청년연합회가 결성되어 1948년 10월 남 · 여 청년연합회 공동주최로 체육대회를 개최하였다. 한편 대구에서도 1933년 이래 활동이 거의 정지된 ‘남방천주공교청년회’의 뒤를 이어 1946년 5월 대구시내 5개 본당청년회를 연합하여 ‘대구가톨릭청년회’를 결성, 경향신문 지사(支社)의 운영, 연합 체육대회 개최 등의 활동을 하였으나, 1948년 9월 ‘대구교구가톨릭청년회연합회’가 결성됨으로써 이에 흡수되었다. 새로 출범한 대구교구의 연합회는 1949년 4월 <천주교회보>를 복간하고 대건출판사라는 인쇄소까지 운영하여 오다가 6.25동란과 재정난까지 겹쳐 1951년 5월 교구당국에 경영권을 인계하였다. 가톨릭 청년운동의 지도적 기구이던 서울과 대구의 두 청년연합회는 <천주교회보.를 통하여 전국 ‘가톨릭청년회연합회’의 결성을 제창하고 꾸준히 추진해왔으나 1949년 주교단의 뜻에 의하여 1949년 8월 ‘대한천주교총연맹’이 결성됨에 따라 무산(霧散)되었다.

   6.25동란으로 교회가 큰 타격과 피해를 입게 되자 일반 청년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연합적 활동은 중단되었고, 대신에 1954년 ‘가톨릭학생회’가, 1958년에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가 결성되어 가톨릭 청년운동을 새로운 모습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반면에 일반 가톨릭청년회는 주로 본당 내에서 성가대, 주일학교 및 중고등부 교사,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서 신심 · 전례 · 교육 및 기타 봉사활동 등을 벌이는데 그치고 말았다. 교회의 쇄신과 현대화를 표방하면서 1962년에 시작되어 1965년에 막을 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교회와 세계 안에서의 평신도들의 올바른 위치와 적극적인 역할을 재확인하고 강조하였다. 특히 공의회 직후 발표된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에서는 조직적 사도직 행위와 조직체로서 가톨릭 운동을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전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1968년 7월 ‘한국 천주교평신도사도직중앙협의회’가 결성되었고 회원단체로서 ‘한국 가톨릭노동청년회’와 ‘대한가톨릭학생전국협의회’가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이 두 단체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걸쳐 한국 교회가 전개한 가톨릭 청년운동의 방향과 사명에 대하여 중요한 시사를 해 주기도 하였다. 한편 1971년 4월에는 전국 가톨릭농촌청년회 전국대표자 회의가 개최되었고, 다음해에는 J.O.C. 산하의 가톨릭농촌청년회(J.A.C.)가 한국 가톨릭농민회로 독립되어 가톨릭 청년운동이 본당, 학원 및 산업현장에서 농촌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70년대 말부터 각 본당 청년회는 다양하게 벌이고 있는 단체활동의 방향을 정립하고,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본당 단위, 나아가서는 지구와 교구 차원의 연합회 결성을 위햐여 노력하기 시작하였?. 그리하여 1980년 9월 발족한 지 5년만에 교구로부터 정식 인준된 부산교구 청년연합회를 비롯하여 대전 · 수원 · 원주 · 인천교구 및 왜관대리구 등에 교구 청년연합회가 결성되어 제각기 다양하고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한편 서울대교구에서는 1978년에 발족한 명동 천주교회 청년단체연합회의 활동에 자극을 받아 각 본당 및 지구 단위의 연합회가 결성되면서 청년미사 · 월례강좌 · 회보 발행 · 체육대회 및 하계 봉사 등을 통해서 가톨릭 청년운동을 위한 의식계발과 청년공동체의 형성 및 교구연합회 결성을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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