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내면에 있는 두 가지 모습, 즉 바리사이와 세리의 양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를 바라보게 됩니다. 때로는 하느님께 죄인으로 나서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옮음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겸손의 바른 모습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리사이가 겸손하지 못하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는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라는 표현은 달리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스스로 의롭다”고 정의하는 것은 기도가 기도가 아닌 자기 자랑이 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하느님 사랑이 우상숭배적인 자기 사랑으로 변질됩니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자기 자신이 “심판관인 하느님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심판관인 그는 하느님이 혹시나 알아채지 못하실까봐 세리의 부당함까지 하느님께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 37) 반면 죄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세리는 겸손한 네 가지 자세를 갖춥니다. 멀찍이 서 있고, 눈을 계속 낮추고 있으며, 가슴을 치고, 자비를 구하며 부르짖습니다. 세금을 거두는 일을 맡은 세리는 실제로 죄인이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회심에 마음이 열려 있었고, 또 그로 인해 하느님을 의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사이와는 달리 하느님께 말씀을 드린다기보다는 단도직입적으로 자비를 청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 11) 그는 극도의 단순함과 진실함으로 자신이 의로움을 지니지 못했기에 하느님의 의로움의 선물을 필요로 하고 청합니다. 이 둘의 대조적인 모습은 우리 안에서도 자주 출몰합니다. 때로는 죄인인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 청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선행이나 희생, 봉사의 모습을 알아주고 보아달라는 교만을 기도라는 장치를 통해 교묘히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신심에서 선택적인 훈련이 아니며, 하느님과 자기의 관계를 보여 주기 위해 이행되어야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겸손을 통한 올바른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함으로써 우리는 가식적이거나 교만한 자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는 분이시고 그것을 이루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진실되고 바른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킵니다. 또 하느님과 더욱 가까운 관계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내면에 지닌 양면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만과 자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겸손을 선택하고 살아감으로써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에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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