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TV를 보는데 ‘본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과학적으로 설명을 해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과학적으로는 우리가 보기 위해서 광원(빛)이 필요하고, 그 다음으로는 빛이 물체에 맞아야 합니다. 이 두 조건이 성립되지 않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물체를 맞고 튕겨나온 빛을 우리 눈이 받아들이고 감지하는 것을 “본다”라고 과학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우리가 여기까지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보는 것과 곤충이 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설명하는데 저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인간은 세 가지 색만을 볼 수 있으며 이 세 가지 색이 조합되어서 다른 색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하지만 곤충의 눈은 인간의 눈과 달라 꽃의 아름다운 모든 색을 볼 수 있다고 하면서 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꽃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원래 꽃이 지닌 색깔보다 훨씬 더 다채롭게 아름다운 색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것을 보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삽니다. 그리고 그 착각으로 인해 때로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겨나게 됩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옳게 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보는 것만이 옳다고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제 1 독서에서도 사무엘은 이사이의 아들들을 보면서 그 겉모습을 보고 판단을 합니다. 겉모습이 수려하고 좋아보인다고 해서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 사무엘 16, 7)는 말씀처럼 우리가 보는 것도 겉이 아닌 마음을 보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함을 일러주십니다. 복음에서 눈을 뜬 소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 – 누구의 죄 때문에 눈이 멀게 되었나 – 에 그 사람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겉으로 판단되는 것으로 죄에 대해 생각하는 제자들과 그것이 죄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합니다. 바리사이들과 눈을 뜬 이와의 대화도 그러합니다. 안식일에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께 그런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바리사이들이 주장하는 법과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이야기하는 그 사이에도 미묘하게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행위는 언제든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에 있어서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부분은 우리 눈을 통과하는 빛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까지 비추는 빛에 따른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빛이 비치고 있으면 우리는 어둠으로 숨어들지 않습니다. 어둠은 우리에게 옳은 판단과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리고 한 번 어둠으로 내려가면 거기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그 어둠이 나를 계속 잠식시키면 우리에게 오는 빛을 거부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오늘 제 2 독서가 전하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에페소 5, 8~10)
빛으로 나아가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또 그 빛은 밝게 비추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빛으로 이끕니다. 우리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느님 사랑의 빛이 다른 그 무엇에 의해 가리워지지 않도록 늘 그 빛을 잘 관리하고 키워나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