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교수의 「신의 위대한 질문」 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예언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예언자, 호모 심파세티코스는 신의 분노를 자신의 삶으로 투영시켜 자기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는 것이다. 점쟁이처럼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신의 의지를 대신 말하는 ‘대변자’이다.” 이와 덧붙여서 예언자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예언자를 뜻하는 단어는 세 가지가 있다. 로에, 호째, 나비가 그것인데, 로에는 동물 내장, 새들의 비행형태, 물 위의 기름이 드러나는 것을 점을 치는 사람으로, 바알 사제, 아세라 여신의 사제들이 황홀경에 빠져 춤을 추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호째는 직업적 예언자가 아니며, 신이 일방적으로 선택해 말씀을 전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선견자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나비는 신의 말을 전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자신의 말이 아니라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신의 음성이나 신들의 회의 장면을 목격하고 그것을 가감없이 전달하는 자이다. 신을 대신해 말하는 자이기에 ‘신의 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예언자 “나비”의 모습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전하는 사람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함도 다시 한번 깊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성경말씀을 통해서도 하느님께 귀기울이고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가 가진 신앙이 올바른 모습이 되고 우리의 삶 역시도 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음을 일깨웁니다. 인간적인 판단이나 생각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신앙의 판단과 결정으로 바라봄으로써 참된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가려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들리는 말이 나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의 행동이나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고, 나의 신앙이 틀리지 않았음을 들음으로써 나 자신은 잘 살고 있다고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참된 충고는 우리를 힘들고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성장시키는 고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충고가 단순히 인간적인 판단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모습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나를 비꼰다고, 나에게 해코지를 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욕심을 채우고 방어하기 위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누구든 하느님의 전달자일 수 있고,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이끄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 판단이 오류를 범했을 때 올바른 길로 이끄는 하느님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