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에 대해서

 In 신앙생활

1. 도입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  시리즈 1/5권. 36-37면>

“무사(無私: 사심없이 공정함)만 하고 보면 암흑이나 사망의 두려움이 없다.  빛을 기(忌: 꺼림)함은 사람의 것을 도적(盜賊)하는 자이지만, 어둠을 기(忌:꺼림)함은 하느님의 것을 도적하는 자(=생명<生命>을 사유<私有>하는 자)이다.  사람들은 흔히 대낮에는 살림을 위해서 다니고 일하고 배우고 놀고, 밤에는 그것을 위해 쉬고 잠자고 꿈꾸는 것으로 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밝은 것이 있는 뒤에는 크게 잊혀진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은연(隱然:뚜렷하지 않으나 어딘가 모르게 모양이 드러남)중의 통신으로서 밤중에 희미한 빛으로 태양광선을 거치지 않고 나타나는,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영혼과의 통신이다. 우리는 이것을 망각하고 그저 잠이나 자고 있다. 한낮에만 사는 것이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없는 소리이다.  빛을 가리어 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대낮에 영원과 사귀겠다는 것은 허영(虛榮:분수에 넘치는 외관상의 영예)이다. 우리가 정말 밝게 사는 것은 영원과 통신할 수 있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낮의 밝음은 우주의 신비와 영혼의 속삭임을 방해하는 것이다. 낮에 허영에 취해서 날뛰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밤에까지 연장하여 불야성(不夜城)을 만들려는 것은 사실 점점 어두운 데로 들어가는 것이다.  영원(永遠)과의 통신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생을 몰락시키는 것 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낮보다 더 밝게 하는 길은 바로 이 길이다. 보이는 것은 빛이 아니다.  햇빛, 달빛, 별빛 다 본들 뭐가 시원한가?  우주의 영원한 소식을 받아들이고 숨은 길로 들어서는 것이 정말 우리가 위로 올라가는 길이다. 하느님은 사랑(1요한 4,16)이시나 사랑이 하느님 될 수 없음같이. 하느님은 빛이시나 빛이 하느님이 아니다.

흔한 사랑이 치미(痴迷: 병과 같은 혼란???)를 일으키고 여러 가지 빛은 허영을 꾸민다. 암흑을 타는 소적(小賊:좀도둑)이 있지만 광색(光色)을 쓰는 대간(大姦:아주 간사한 사람)이 많다. 태양계에서 미(美)와 역(力)의 대본(大本)이 태양이지만 태양은 물질이니 우주의 작은 화로(火爐)이다. <광(光)은 우주파동의 소부분(小部分)> 정신은 물질보다 크다. 물질 이상이다.

공(功)을 감추는 미(美)와 역(力)은 등잔 속의 기름이요, 상을 타는 광영(光榮)은 심지 끝의 불이다. 기름은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의 영원하신 지시대로 감이요, 불은 바래진 세상의 한때 자랑이다. 창세기에 ’(먼저)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다<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하루하루의 사업을 마칠 때마다 밤, 낮 하루가 지났다. 1,5.8ff>’고 하였고 묵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 햇빛이 쓸 데 없다<묵시록 21,23 : 새 하늘과 새 땅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도성을 밝혀주며 어린양이 등불이다>’ 하였으니 첨도 저녁이요, 나중도 저녁이다. 첨과 나중이 한 가지로 저녁이다. 저녁은 영원하다. 낮이란 만년을 깜박거려도 하루살이의 빛이다.”

우리나라 근대시기에 어느 종교인로도 살지 않았지만, 뭔가 생각하게 하는 말을 남기신 ’다석(多夕) 류영모’ 선생님의 뜻을 담은 글을 읽어드렸습니다.  비 신앙인으로서도 이런 글을 남기고 우리에게 삶의 올바른 지침을 남겨주는 모습을 통하여 오늘 생각해 보고 싶은 주제는 ’신앙생활’에 대한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신앙생활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을 보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인정할 것인가? 대답이 어려운 커다란 숙제이자, 질문입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차이점을 지적하고 나갈 것은 ’신앙생활’과 ’종교생활’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다른가?  첫째 말이 다르죠. 그러므로 뜻도 다를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말은, ’신성한 대상을 절대시하여 믿고 받드는 일’ 이라는 의미이고, ’종교’라는 말은 ’초인간적·초자연적인 힘에 대해 인간이 경외·존숭·신앙하는 일의 총체적인 체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말에 연결된 생활이라는 것도 분명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견진교리를 하는 이 자리에서 다루고 있는 일의 성격을 따라서 보자면, 종교라는 말보다는 신앙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의미가 될 것입니다.  ’나는 종교인’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나는 신앙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남다르게 사는 방법을 선택하는 일이 될 것이고, 우리가 행해야 할 올바른 길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신앙생활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을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어디에 그런 질문과 답이 나와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분류방식에 따라 교리를 나누는 방법을 적용하면, 그 의미를 좀 더 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통적인 교리방법에서는 교리에 대한 내용을 크게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하느님과 그 분의 업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믿을 교리, 그분의 은총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성총을 얻는 방법,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인 것에 대하여 우리가 올바른 정신과 삶으로 표현하는 지킬 계명이 그것입니다. 이 분류방법에 따라 이야기하면, 우리가 지금 말하는 신앙생활의 올바른 과정이란, ’성총을 얻기 위해서 지킬 계명에 대해 성심 성의껏 사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3. 신앙생활을 잘하는 방법

이러한 의미를 갖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고, 참으로 쉬운 질문이기도 합니다.  지난 번 교리 언제인가에, 여러분에게 이와 비슷한 질문에 제가 답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여러분들은 다들 웃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드리는 질문에 대한 응답도 같은 답이 나와야 정상입니다.  어떤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방법인가?    정답 : 열심히 하는 것이다.   <웃는가?  웃지 않는가?>

이렇게 말씀드리기는 하지만, 차이점은 있습니다.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렇다고 봐주는 대상이 누구냐가 문제이죠.  내가 생각하는 한도에서 열심인 것이냐?  모르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제까지 알아듣고 활동한 것을 훗날 판정해 주실 하느님의 입장에서 열심인 것이냐의 차이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답의 바탕이 되는 것은 인간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의 자세가 조금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을 무조건 협박하거나 위협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 적어도 신앙인으로 살아간다고 생각을 하려면 좀 더 신중하거나 우리 삶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기준점이 보통 사람들의 생활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잘하는 방법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하는가?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주일에 한번씩 성당에 오시기 부담스러우시죠.  가족들 가운데 한쪽 편만이 신자인 경우, 특히 부인만 신자인 경우 다른 가족을 집에 모셔놓고(?) 주일에 성당에 오시는 것이 무척 죄스러우시죠?  우리 고양동 성당에서는 그렇게 할래야 할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지만, 다른 본당에서 지내신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같은 주일이라도 시간을 미루고 미루다가 저녁 늦은 미사에 가야지 하면, 왜 그리도 누가 찾아오고 자신이 꼭 해야할 일이 생기는지 궁금하기도 하죠.  학생들의 경우도 다르지는 않죠.  성당에 다니지 않는 친구들과 놀러 가고 싶고, 따로 만나서 데이트(?)도 하고 싶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따로 하고 싶은데, 왜 주일에는 미사에 꼭 가야만 하는지, 그리고 재미없는 교리는 왜 꼭해야 하는지, 주일학교에 와서 듣는 교리는 내가 학생으로 사는 생활에 전혀 도움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들어야 하는지…. 하는 생각들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질문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그 삶의 결실이 무엇인지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작부분에서 ’다석 류영모 선생님’의 읽어드린 말씀을 기억해보면 이런 질문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성실하게 살고, 열심히 살고, 삶의 중심을 확실하게 하느님이 원하시는 곳에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필요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방법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으며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으며 살아가는 방법으로 교회에서 제시하는 것은 ’기도와 성사’에 올바른 자세로 임하고 사는 것입니다.  기도가 힘들다고 하면서도 하고자 한다면, 잘할 수 있습니다. 엊그제 말씀 드렸나요? ’도둑질도 해본 놈이 잘한다고….  자꾸 해 봐야 합니다.  그래야 이치를 터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살았으면, 하느님을 우리가 직접 만나는 ’성사생활’에 소홀하지 않는 것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의무로 한다면, 남들과 비교해서 뒤쳐질 바는 없겠지만 남에게 본보기가 될 수는 없는 생활이 그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일은 그렇습니다. 아니 그런 결과를 맺고 맙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우리가 갖는 시작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두 가지만 강조하겠습니다.  많이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는 화해성사와 성체성사에 대해서 보통 사람들이 갖는 자세와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돌리기만 하면, 이사야 예언서 38,17에 나오는 히즈키야 임금의 노래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당신의 등뒤로 던져버리셨다’는 찬미가를 우리도 노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돌리는 일이 그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에게 양식이 되기 위해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정성이 가득한 마음으로 자주 만나는 일입니다.  이 일도 억지로 해서는 그 결과가 의심스러울 만치 곤란할 것입니다.  여러 차례 자주 강조합니다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기꺼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원한다고 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더 잘 알아듣고 살기를 원한다면 하느님 자신, 하느님의 아들을 맞아들일 준비에 지금보다는 좀 더 정성을 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방법은 우리가 미사에 성실하게 준비된 마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헐레하고도 벌떡의 마음이 아니라, 준비되고도 차분한 마음이 절대적입니다.  물론 사람이 하는 자세에 대한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아시고 판단하시겠지만, 그에 대한 올바른 준비를 하려면 다른 인간에게도 어느 정도는 괜찮은 평가를 받는 생활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나는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서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면 마음이 상하기 마련입니다.

4. 신앙생활에 남다른 본보기를 보인 사람을 우리는 성인이라고 부른다

여러분들은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오늘까지 네 번째 교리를 통해서 견진성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견진성사가 무엇을 말하는지 말씀드렸으니 따로 반복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견진성사는 세례성사의 완성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가 이제는 상속자로서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에 필요한 마음의 다짐을 하는 것이 여러분이 견진교리에 오실 때 가져야 할 마음과 자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견진성사를 받고 난 다음 무엇을 어떻게 할 사람들인가?  어떤 본보기를 보일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가?

세례성사를 받은 우리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외에 외국인의 이름이 섞인 다른 이름들을 가졌을 것입니다.  저는 그 이름을 한자와 우리말을 섞어서 ’요한금구’라고 부릅니다.  세례명입니다.  우리가 이 이름을 받은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바로 본보기를 보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명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남겨준 분들은 세상에서 지낸 생활이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과 본보기가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세례명을 받음으로써 나아가야 할 바는, 그 분들이 보이신 삶의 본보기를 부분이나마 본받자고 하는 일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에게 그 이름을 남겨주신 분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성인이요, 성녀’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분들입니다.  왜 같은 인간이면서 우리는 그 분들을 ’거룩하다<聖>’고 말하는가?   우리가 하느님께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기에 그렇게 부릅니다.  여기서 알려준다고 하는 것은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향해 지적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름으로 가진 성인들이 이 지상의 삶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세례명을 지을 때, 가끔씩은 예쁜 이름, 편한 이름을 찾습니다. 마치도 이름만 그럴싸하게 지으면 다 된다는 것은 아니겠지만, 온통 첫 번째 목적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합니다.  우리의 부모님들도 우리의 이름을 지어주기에 고생하셨습니다. 반드시 부르기 쉬운 이름만을 찾느라고 그렇게 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름 석자 혹은 넉자가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을 통해서 본보기를 보여주신 우리의 성인들을 부끄럽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5. 올바른 삶의 기준을 세우는 방법으로 신앙의 역할

자신의 귀중함만을 주장하는 요즘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신앙생활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어디 살겠는가’하는 생각을 갖는 분이 있다면, 정말로 자신의 생활 모습을 다시 세워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돈을 모조리 끌어다 모아서 내 것으로 생각하고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결국 그것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무슨 특별한 일을 잘 한다고 해서 남에게 아무리 칭찬을 받는 생활을 해도 그것이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갈 수 있는 ’통과 권리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자신은 물론이고, 내가 자식을 아무리 잘 키우고 ’이 정도면 내가 자식에게 할만큼은 다 했는데…..’해도 하느님에게서 ’넌 참 지상에서 열심히 잘 살았구나!!’하는 판단을 받게 해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도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완벽하게 갖추고 살고 있는 사람은 아니기에 자신감 있게 말씀드리지는 못합니다만, 그렇게 살고자 한다면, 우리가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지상에서 모으는 재물의 한계가 없듯이 우리가 이제는 다 했다고 할만한 만족할 수준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서를 자주 읽고,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되새기고, 삶을 위한 지침으로 삼으며,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서로 신앙으로 격려하고, 언제라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예! 준비되었습니다”하고 나아갈 자세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작성자 : 이철희(카톨릭 교리서/천주교 서울대교구) ⓒ Good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