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접하는 성경말씀에서 초점을 두어야 할 부분은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며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자비로움으로 인해 용서를 청하면 언제든지 우리를 그 자비 안에 머무를 수 있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한없이 넓으신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당신의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 13항에서 교회 본연의 모습은 ‘자비’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자비를 고백하고 선포할 때에 본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비가 창조주와 구세주의 가장 놀라운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구세주의 자비의 샘에 가까이 가게 만들 때에 본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자비의 관리자요 분배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말씀을 통하여 묵상해 볼 것은 죄의 용서를 위한 자비입니다. 꽤나 학식이 있고 배웠다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인 자비를 가르치기 보다는 죄를 지은 여인에 대해 어떻게든 단죄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거기에 더 보태서 간음한 여인을 미끼로 해서 예수님을 붙잡을 기회를 획득한 그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이라 추측하고 득달같이 덤벼듭니다. 그로 인해 실추되었던 자신들의 위치 회복을 위한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악한 생각으로 덤벼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기분좋게 하이킥을 날리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 7) 이 말을 듣고 찰나에 스쳐가는 죄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죄없는 사람이 세상에 없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에 대한 처벌보다 중요한 것은 죄를 지은 이를 발견했을 때 먼저 다그치고 책벌할 것이 아니라 죄를 짓게 된 상황을 때로는 이해해야 하며, 또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자세를 보이며 마음으로 용서를 청할 때 자비를 베풀어야 함을, 그리고 그 용서 안에서 죄를 짓지 않으려는 다짐을 통해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흔한 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말로 나의 죄를 정당화하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모습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자비를 입은 만큼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인다운 모습이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입니다. 신앙인인 ‘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신앙인‘다운’ 모습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신앙의 삶이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