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연중 제 24 주일2020-09-13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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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어느 텔레비젼 프로그램에서 한 부인이 자신의 어머니를 찾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부인은 어릴 때 어머니가 자신을 버려서 고아원에서 지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가정에 입양되어 살았는데 새 어머니와의 불화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집에서 가출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낳아주고 길러준 두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이 불쌍한 여인은 세상의 온갖 고생을 겪으며 마음속으로는 두 어머니, 특히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증오하며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착하고 부지런한 남편을 만나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사랑을 처음으로 맛보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 성당도 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자생활을 하면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두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었습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길러주신 어머니를 찾아가 용서를 청하고 또한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도 화해를 하고 싶어 방송 프로그램에 나오게 되었다고 이 여인은 말했습니다.

 

그 여인의 절규와 오열하는 모습이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용서의 가르침은 율법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 다른 이를 용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용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겸손되이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께 받은 용서는 빚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빚은 갚을 수 없는 하느님께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섬기고 다른 사람에게 용서로써 갚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심판과 경고의 의미를 지닙니다. 임금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나 빛을 탕감받은 종이 풀려나서는 백 데나리온 빛을 진 동료를 감옥에 처넣습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임금은 몹시 노하여 무자비한 종을 형리에 넘깁니다.

 

마지막 날 모든 것을 분명하게 셈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은총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 용서를 받고 다른 이를 용서해 주지 못하는 편협한 사람,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용서가 아닐까 합니다. 특히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치고, 고통을 안겨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준 사람에게 똑같이 복수하고 싶은 심정은 누구나 같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인간적으로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용서하라, 무한히 용서하라‥‥ 」 어쩌면 용서하라는 것은 사랑하기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표현은 바로 용서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이를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고 생각이 들 때 우선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다른 이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을 주고 살았는가?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또한 내 주위에 많은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혔는지를 솔직하게 반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계명은 한 마디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내가 나에게 잘못한 이를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능력의 결과입니다.

 

나는 잘못이 없지만, 동정과 사랑으로 내가 너를 용서한다는 마음을 지닌다면 그것은 교만한 생각입니다.

 

용서는 단순히 잊어버리거나, 상처를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베푸신 지극한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또한 나와 너, 우리 모두 약하고 죄 많은 인간임을 겸손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할 수 없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용서의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은 내가 용서하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바로 그 마음을 가상히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형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내가 화해하지 못하고 미움과 증오에 사로잡혀 주님 대전에 나가 제물을 바쳐도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의 제물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용서하는 것은 신적인 행위라고 말하십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닮는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우리들은 신앙생활 가운데 언제나 하느님을 닮으려는 노력을 해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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