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아도 보초 경계를 게을리 한 지휘관은 용서받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실수라도 작전의 실패와 보초 경계의 태만은 차이가 큽니다. 작전의 실패는 최선을 다하다가 실패한 것이지만 보초 경계의 태만은 그 자체가 이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보초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 한 사람에 의해서 전체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보초는 항시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되며 위험이 있을 시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재난 을 피해야 합니다. 일찍 알렸는데도 그에 대응치 못해서 사람들이 다치면 그것은 그 사람들 잘못이지만 알리질 못해서 사고를 만났다면 그것은 순전히 보초 책임입니다. 예언자는 시대의 보초입니다. 위험이 있을 때 그는 두려움 없이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보초로서 소임받은 내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은 그 고달픈 직무 때문에 왕과 백성들에 게 미움을 받아 참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보초의 임무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유럽에서 어떤 왕이 낮잠을 자는데 왕궁 뒤에 있는 방앗간의 풍차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루자 짜증이 생겼습니다. 화가 난 왕은 신하를 시켜 풍차를 부숴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하들이 달려가서 그 풍차를 부숴 버리자 방앗간 주인이 나와서 “왕은 백성의 아버지인데 자녀들이 생업에 힘쓰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한 몸의 평안을 위해 재산을 부숴 버리다니 이 나라의 장래가 걱정된다."며 한탄했습니다. 신하들이 이 말을 왕에게 전하자 왕은 방앗간 주인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풍차를 다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왕이 바로 프로이센의 프레데릭 대왕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충고의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잘못은 있을 수 있고 실수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충고가 필요합니다. 우리들 인간은 현세에 살고 있는 한 누구나 남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고, 또 한 타인과 필연적으로 공존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이라면 그는 인간의 도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자기 모순을 저지르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구원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가진 자라면 타인에 대해 무관심 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가진 자라면 타인에 대해 무관심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사랑을 쏟는 태도는 적극적 의미로는 타인이 잘 되도록 협력할 것이며 잘못이 있을 때는 충고하여 잘못이 없도록 인도하는 것이겠습니다. 타인의 잘못에 대하여 수수방관하거나 무관심하다면 타인은 결국 구원의 빛을 잃게 되며, 수수방관한 그리스도교 신자는 방조죄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사실 자기 자신을 잘 바라보지 못합니다. 자신보다는 옆에서 더 잘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옆에서 들려주는 충고를 받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큰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솔직한 충고를 해 줄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에겐 모두 보초의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잘못은 지적하고 고쳐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남이 잘못되고 있는데도 충고하지 않고 바로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공범잡니다. 불이익을 당한다 해도 틀린 것은 지적하고 고쳐 줄 때 그가 참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훌륭한 보초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남의 말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이 손상된다 해도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형제적 사랑으로 이웃에게 충고합시다. 또한 겸손한 마음으로 충고를 받아들입시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갈 때에 그를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그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것이고 또 자기 자신이 많은 죄를 용서받게 될 것입니다(야고 5,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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